디지털카메라의 최후. by  승


  아르바이트를 마친 후 윰과 늦은 저녁을 먹었다. 밥먹고 바로 운동하기가 뭐했기 때문에 헬스에 가기 전 먹은 것을 소화시키기 위해 주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남영동 미군기지 부근 후미진 골목에서 연사를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30여분을 보내니 저녁이 좀 소화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헬스에 갔다. 나는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작은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갔다. 시원했다. 빤쭈를 올리며 일어나는 찰나, 휴학생임에도 줄창 입고다니던 회화과 후드티의 왼쪽 주머니에 들어있던 물체가 변기로 낙하했다. 그것은 디지털카메라였다. 카메라는 슬리퍼모양의 변기 가장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순간 정신이 멍해지며 몸이 굳었지만 가까스로 물(?) 밖으로 비어저나온 스트립을 쥐고 꺼냈다. 헬스 여자 탈의실에는 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휴지에 둘둘만 디지털카메라를 윰에게 내밀어보였고 윰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모든 상황을 받아들였다. 전원을 켜보았으나 디지털카메라는 전혀 다른 세계의 화면을 나에게 보여주었고, 짐승에게 문자를 했더니 전원을 왜 켰냐고 했다. 물론 전원을 켜면 망가진다는 걸 알지만, 지금 당장 안녕한지 궁금했단 말이야... 나는 디지털카메라에 묻은 나의 흔적이라도 지우고자 헬스장의 샤워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작동했다. 샤워기에선 몹시 따뜻한 물이 나왔다. 물의 온도에 울고싶었으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의욕을 상실한 나는 윰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윰은 운동복 차림이었고, 나는 여전히 왼손에 휴지로 둘둘만 디지털카메라를 쥔 상태였다. 트레이너 노청년님께서 운동 하지 않고 가느냐길래 나는 휴지로 둘둘만 디지털카메라를 내밀며 변기에 빠졌다고 했다. 순간 트레이너 노청년님의 얼굴에는 오묘한 표정이 스쳐지나가며 모든 것을 납득한 목소리로 얼른 수리를 맡겨야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미 내 왼손에 쥔 물체는 카메라라고 부르기에 미묘한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가장 슬픈 사실은, 이것은 모두 내 몸에서 생성된 물질에서 비롯된 일이므로 누구를 탓할 수도 없으며 내가 책임져야 할 업보라는 것이다. 아...


  집에 와서 메모리카드를 확인해보니 다행스럽게도 메모리카드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마지막 사진은 바로 이것이었다. 노인 옆에 누운 윰, 가히 기념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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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카 부활 2009/06/01 01:29 #

    디지털카메라의 최후. 그리스도는 밤낮 사흘을 보낸 뒤에야 부활했다고 하던가. 문득 생각나서 디카를 작동시켜보니 완전하게 작동을 했다. (미묘한 램프 문제는 있지만서도.) 변기에 풍덩하고 나서도 그걸로도 모자라 뜨거운 물로 샤워까지 시켰는데 멀쩡하다니. 이렇게까지 튼튼할 것이라곤 바라지도 않았는데,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파나소닉 루믹스만 사기로 마음먹었다. 이 얼마나 위대한 기계인가. 영원히 그 이름을 찬양하겠어...... more

덧글

  • Song 2009/05/20 22:00 # 답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과푸 2009/05/21 20:39 # 삭제 답글

    어이쿠..ㅠㅠ눈물이..ㅠㅠ
  • 푸른 2009/05/21 23:55 # 답글

    마..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했네요. 멋진 사진이에요.. ㅠ.ㅠ
  • 카를레아 2009/05/25 14:53 # 답글

    잠깐...눈물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너무 슬퍼요...ㅜㅜㅜ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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